내 인생의 편지
신현주
어여쁜 꽃봉투에 깨알같이 적은 마음을 고이 접어 보내온 편지를 읽어본 지도 꽤 오래전 일인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적어도 내가 20대까지는 귀가길, 한옥 대문 가까이 다가갈 때면 기대와 설렘 속에 편지함을 바라보던 기억이 있다. 전자우편시대가 열리고, SNS 문화가 번성하면서 택배를 보낼 때를 제외하고는 우체국에 갈 일은 거의 없어졌다. 어찌보면 번거롭지도 않고 경제적이기도 해서 좋다 할 수 있겠지만, 나처럼 늘 편지를 기다리고 편지를 즐겨 쓰던 사람에게는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되돌아보면, 편지글은 사진첩보다도 더 깊은 추억을 되살리게 해준다. 편지글을 읽노라면 나의 속사람을 보다 객관적이고, 정직하게 바라보며 성찰할 수 있다. 또한 편지를 쓴 상대방의 입장과 그 마음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지난날의 아름다운 편지들을 읽으면서 울고, 웃게 해주니 치유 효과도 크다. 그 사람들이 얼마나 고맙고 정다웠는지 얼마나 소중했는지 그리고 그 때가 얼마나 아름다운 시절이었는지 깨닫게 해주고 그 당시보다 더한 감동을 안겨주니 편지글은 놀라운 힘이 있다.
누군가를 위해 내 마음을 글로 적어내려가기 시작한 것은 25년 전 남편과 만나면서부터다. 남편과 교제하는 이 년동안 나는 그에게 50통의 편지를 썼다. 그 편지는 답장을 전혀 바라지 않고 썼던 글이었다. 내 마음속에 담겨 있는 수많은 이야기를 조심스레 고른 편지지 위에 정성스레 글로 풀어내어, 만날 때마다 그에게 건네주는 것이 당시 가장 행복하고도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결혼 이후에도 나의 편지쓰기는 10년간 계속되었다. 그 편지도 거의 50통에 가깝다. 지난해 결혼 22주년을 맞이하면서 나는 그 편지를 연도별로 정리하며 다시 읽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남편이 준 편지들을 다시 읽으며 그때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10년 전 남편은 덕유산에서 개최되었던 품성캠프 가운데 틈을 내어 나에게 긴 편지를 썼다. 신앙의 가치를 따라 주님의 부르심이라 여기는 외길을 지난 23년간 함께 걸어왔지만, 그 편지를 읽으며 내가 얼마나 부족한 아내였는가를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부족한 나에게 시집와서 나이 사십이 되어 주님의 부르심을 찾아 뒤늦게 떠난 나를 의지하며 불평하지 않고 따라준 것에 깊이 감사하오. 당신이 나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격려하며 따라 주었을 때, 나는 소명을 찾아 나서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소. 정말 감사하오…”
지난 10여 년간 남편과 함께 ‘쉐마학교’라는 기독교대안학교를 운영해오고 있다. 기도 가운데 다음 세대를 염려하며 시작한 일이기에 때로는 힘겹게 느껴져도 쉽게 놓을 수 없는 부르심의 장長이다. 사람을 키우는 가치와 보람이 없다면 이 시대에 누가 이런 일을 하려고 하겠는가? 잔잔한 보람을 경험할 때는 제자들이나 부모님께 편지를 받았을 때이다. 제자들에게 감사하다는 편지를 받았을 때도 나는 고마웠지만 한없이 부끄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정말 좋은 스승이었는가?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도 없이 그들을 대했는가?” 자성하면서도 따뜻하고 뭉클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 순간 감사와 기쁨이 고통의 순간만큼 정화되어 다가온다.
3년간의 학교 생활 속에서 많은 성장을 하여 교사들에게 큰 기쁨을 안겨주었던 한 제자의 편지를 다시 읽어본다.
“…어느새 중3이 되어 졸업을 앞두고..…지난 3년의 긴 시간 동안 저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자신밖에 모르고 친구는 본체만체하며 고집스러웠던 14살의 아이가 이제 남을 배려하는 친구로 변하게 되었어요. …저는 그냥 지나가는 학생일 뿐, 남남인데 선생님들은 저를 친자식처럼 돌봐주셨습니다. 저에게 주신 사랑으로 세계에 나아가고 또 그 사랑을 베풀고자 합니다.…”
편지는 단절된 시간 속에 잠시 멈춰 있던 관계의 끈을 다시 끈끈하게 연결해주고, 끊어진 대화를 이어주는 힘이 있다. 20여 년 전 미국으로 건너간 우리 부부의 후배와 몇 년 전부터 함께 나눈 이메일을 다시 펼쳐보았다. 후배부부의 마음과 삶의 여정 그리고 신앙의 모습을 함께 그리며, 그들을 위해 무엇을 기도해야하는지 알 수 있는 편지였다.
“…저희는 요즘 뒤뜰에 밭농사(?)를 지으며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봄에 그저 씨를 뿌리고 물을 준 것 밖에 없는데… 어디서 그런 생명의 힘이 나오는지 그저 신기하기만 합니다. …믿음의 농사도 비슷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지금은 너무 분주하여 그런 시간을 길어내기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나는 일부러라도 짬을 내어 편지글을 적으려 노력하곤 한다. 특히 이 작업은 가족이 모두 잠든 새벽에 종종 이루어지는데, 요즘에는 지면이 아닌 SNS나 전자편지 안에서 기도 내용을 함께 나누면서 그리운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는데, 그 시간은 나로 하여금 인생을 살아갈 힘을 얻는 소중한 시간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영혼의 에너지가 고갈되어가고, 삶의 뿌리가 흔들리는 듯 불안할 때 주님께서 보내오신 편지를 거듭 읽으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것처럼,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일상과 편지를 연결하여 펼쳐가는 작업 또한 내 인생의 새싹이 다시 파릇하게 돋아나는 물줄기가 되고 있음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