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네피요르드를 관광하기 위하여 플롬이라는 곳을 경유하여 유람선을 탔습니다.
가는 도중 산 정상에 쌓여있는 아름다운 눈을 참으로 깨끗하고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습니다.
중간 중간에 산에서 흘린 물로 인하여 작은 폭포수들과 그 밑에는 호수들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도로변에 대나무 등으로 표시해놓은 눈의 높이를 보면서 겨울에는 무척 눈이 많이 오며 차량이 다니지 못하는 곳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송네피요르드를 관광하면서 자연스럽게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렸습니다.
세상에서 이런 저런 모습의 죄악들을 행하고 살게 되는데 이러한 모든 죄악들을 깨끗하게 하여 주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사실 죄악의 문제는 사람들에게 너무나 큰 짐인데 하나님이 깨끗하게 해준다고 말씀해 주셨고 예수님이 십자가위에서 그 일을 성취해주셨습니다.
주님은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눈처럼 깨끗하게 된 우리들은 주님이 비추시는 빛을 통하여 세상으로 흘러내려가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깨끗하게 된 내가 앞으로는 주님을 본받아 거룩한 모습으로 살고자 합니다.
산정상에 있는 눈 속에는 만년설이 있습니다.
내린 눈이 일부는 녹아내리지만 밑에 있는 것들은 내리지 않고 계속 쌓여만 갑니다.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 것은 하나님, 하나님이 하신 말씀, 인간의 영혼입니다.
만년설에 비하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너무나 짧고 보질 것 없음을 알게 됩니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을 주님이 우리들에게 부탁하였으므로 그 일을 선택하고 집중하다보면 훌륭한 결과들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 그림같이 아름다운 송네피요르드 관광
송네피요르드는 100만 년 전인 빙하시대에 빙하의 압력으로 깎여진 U자형 계곡(피요르드)으로 노르웨이에서 가장 길고(204km가장 깊은(1,309m) 피요르드이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이 피요르드는 좁은 협만 주변으로 장엄하고 숨막히는 대자연의 아름다운 경관이 전개된다.
산꼭대기에는 하얀 눈이 절벽에는 가느다란 폭포수가 피요르드의 조용한 해면을 타고 흘러내리는 절경이 아름답다.
그러나 강이 아니고 모래사장이 없는 바위뿐이며 해안에서 갑자기 깊게 되어 있어 해수욕은 꿈도 못 꾼다.”
드넓게 펼쳐진 초원 속에 소, 말, 양들을 방목하거나 목초지들이 사라졌다가는 다시금 이어지기를 반복하였습니다.
숙소 근처에 있는 목초지에 있는 양들을 보니 경계구역안에서 풀을 먹는 모습이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목둘레에 종을 달았으며 소유를 구분하기 위하여 띠를 두르기도 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목자이시며 우리는 그의 양입니다.
주님 안에서만이 참된 평화와 안식을 누리며 살수 있습니다.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기만 하면 푸른 초장 맑은 시냇물가로 인도하여줄 것입니다.
여행도중 그 넓은 초장 속에서 농부들을 거의 볼 수가 없었고 피요르드주변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구경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낚시를 한다고 하여도 허가를 받고 몇 마리이상을 잡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번 추석기간 동안에 진해에 있는 형님 댁에 가서 낚시를 하였는데 좁은 해변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우리들과는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초등학교 아이들은 숙제도 거의 내주지 않고 구구단조차도 다 외우는 아이들이 적다는 이야기가 물건을 살 때 계산기가 아니면 잘못하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입시전쟁을 준비하는 우리 아이들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들입니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문제는 인구가 많음으로 발생하는 것이 많고 아울러 주변 환경이 너무나 다름으로 인하여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들이 너무나 다른 것입니다.
자유를 만끽하고(?) 사는 우리들과는 너무나 사는 모습들이 대조적이었습니다.
버스로 이동 중에 그리그의 페르퀸트 음악을 들려주었지만 처음 접해 본 곡이라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 곡에 대한 설명을 해주어 다음에 배경을 조금 이해를 했으므로 다음에 시간을 내어서 그 노래를 다시금 감상하려고 합니다.
“에드바르트 그리그 (Edvard Grieg, 1843~1907, 노르웨이)
노르웨이의 항구도시 베르겐에서 태어난 국민주의 음악가, 그리그는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같은 베르겐 출신의 유명한 피아니스트 올레 불의 인정을 받아, 그의 권유로 15세 때(1858년)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유학하여 4년간 작곡과 피아노 주법을 배웠다.
“1862년 졸업 후 베르겐으로 돌아온 그는 거기서 작곡가와 피아니스트로 정식 데뷔했다, 귀국 후 21세 때, 같은 노르웨이 출신의 젊은 작곡가였던 노르드라크와 깊은 우정을 맺고, 그의 영향을 받아 그리그는 완전히 국민주의의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이듬해 코펜하겐으로 옮긴 그리그는 덴마크 작곡계의 대가인 닐스 가데와 리하르트 노르트라크를 만나 <오이테르페 협회>를 발족, 노르웨이 작곡가들의 작품 연구와 연주활동에 주력했다.
1865년에 로마로 여행했고, 1870년에 리스트의 초대로 재차 로마를 방문하게 되는데, 이때 그리그의 《피아노협주곡》(1868)을 연주한 리스트는 그를 매우 극찬하였다
유명한 그의 《장송 행진곡》은 잠시 로마에 있던 시절에 노르트라크의 사망 소식을 듣고 작곡한 곡이다.
다시 노르웨이로 돌아온 그리그는 오슬로 음악원 부원장, 필하모니아 협회의 지휘자 등을 겸하면서 작곡가에 몰두했으며, 여류 성악가 니나 하게루프를 사랑하게 되어, 안데르센의 시에곡을 붙인 가곡 《나 그대를 사랑해》를 작곡하여 유명해졌고, 그들은 결혼해서 오슬로에서 생활했다.
1867년에 오슬로 음악 협회를 조직하여 7년간 지휘자로 활약했고, 1874년 31세 때 노르웨이 정부로부터 국가의 종신 연금을 얻어 작곡에 전념했다.
그 후 고향인 베르겐이나 오슬로에서 주로 생활했다.
1885년부터는 베르겐에서 조금 떨어진 트롤드하우겐에 집을 짓고 쇠약해진 몸을 요양하면서 전원생활을 즐겼다.
이 사이에 가끔 라이프치히, 로마, 파리, 런던 등지를 여행하여 자신의 작품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그의 아내 니나는 그리그의 가곡을 직접 불러 보급하는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그리그는 1907년에 영국으로 연주 여행을 떠날 때, 배를 타기도 전에 병이 무거워져 베르겐의 병원에서 9월 4일, 세상을 떠났다.
그리그는, 1877년부터는 로프트휘스에 틀어박혀 작품 창작에만 몰두하며, 세상을 떠나는 1907년까지 피아니스트로서의 발표회도 쉬지 않았다.
그가 남긴 《교향적 무곡》《서정 모음곡》《제3바이올린소나타》(1885∼1887), 피아노곡인 《노르웨이의 농민무용》(1902) 등은 견고한 하모니와 감수성이 노르웨이 민속정서와 잘 어우러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사랑받고 있다.
특히 입센의 부수음악으로 작곡한 《페르귄트》(1876 초연)는 가장 유명한 곡이다.”
가는 도중 산 정상에 쌓여있는 아름다운 눈을 참으로 깨끗하고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습니다.
중간 중간에 산에서 흘린 물로 인하여 작은 폭포수들과 그 밑에는 호수들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도로변에 대나무 등으로 표시해놓은 눈의 높이를 보면서 겨울에는 무척 눈이 많이 오며 차량이 다니지 못하는 곳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송네피요르드를 관광하면서 자연스럽게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렸습니다.
세상에서 이런 저런 모습의 죄악들을 행하고 살게 되는데 이러한 모든 죄악들을 깨끗하게 하여 주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사실 죄악의 문제는 사람들에게 너무나 큰 짐인데 하나님이 깨끗하게 해준다고 말씀해 주셨고 예수님이 십자가위에서 그 일을 성취해주셨습니다.
주님은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눈처럼 깨끗하게 된 우리들은 주님이 비추시는 빛을 통하여 세상으로 흘러내려가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깨끗하게 된 내가 앞으로는 주님을 본받아 거룩한 모습으로 살고자 합니다.
산정상에 있는 눈 속에는 만년설이 있습니다.
내린 눈이 일부는 녹아내리지만 밑에 있는 것들은 내리지 않고 계속 쌓여만 갑니다.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 것은 하나님, 하나님이 하신 말씀, 인간의 영혼입니다.
만년설에 비하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너무나 짧고 보질 것 없음을 알게 됩니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을 주님이 우리들에게 부탁하였으므로 그 일을 선택하고 집중하다보면 훌륭한 결과들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 그림같이 아름다운 송네피요르드 관광
송네피요르드는 100만 년 전인 빙하시대에 빙하의 압력으로 깎여진 U자형 계곡(피요르드)으로 노르웨이에서 가장 길고(204km가장 깊은(1,309m) 피요르드이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이 피요르드는 좁은 협만 주변으로 장엄하고 숨막히는 대자연의 아름다운 경관이 전개된다.
산꼭대기에는 하얀 눈이 절벽에는 가느다란 폭포수가 피요르드의 조용한 해면을 타고 흘러내리는 절경이 아름답다.
그러나 강이 아니고 모래사장이 없는 바위뿐이며 해안에서 갑자기 깊게 되어 있어 해수욕은 꿈도 못 꾼다.”
드넓게 펼쳐진 초원 속에 소, 말, 양들을 방목하거나 목초지들이 사라졌다가는 다시금 이어지기를 반복하였습니다.
숙소 근처에 있는 목초지에 있는 양들을 보니 경계구역안에서 풀을 먹는 모습이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목둘레에 종을 달았으며 소유를 구분하기 위하여 띠를 두르기도 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목자이시며 우리는 그의 양입니다.
주님 안에서만이 참된 평화와 안식을 누리며 살수 있습니다.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기만 하면 푸른 초장 맑은 시냇물가로 인도하여줄 것입니다.
여행도중 그 넓은 초장 속에서 농부들을 거의 볼 수가 없었고 피요르드주변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구경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낚시를 한다고 하여도 허가를 받고 몇 마리이상을 잡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번 추석기간 동안에 진해에 있는 형님 댁에 가서 낚시를 하였는데 좁은 해변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우리들과는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초등학교 아이들은 숙제도 거의 내주지 않고 구구단조차도 다 외우는 아이들이 적다는 이야기가 물건을 살 때 계산기가 아니면 잘못하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입시전쟁을 준비하는 우리 아이들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들입니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문제는 인구가 많음으로 발생하는 것이 많고 아울러 주변 환경이 너무나 다름으로 인하여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들이 너무나 다른 것입니다.
자유를 만끽하고(?) 사는 우리들과는 너무나 사는 모습들이 대조적이었습니다.
버스로 이동 중에 그리그의 페르퀸트 음악을 들려주었지만 처음 접해 본 곡이라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 곡에 대한 설명을 해주어 다음에 배경을 조금 이해를 했으므로 다음에 시간을 내어서 그 노래를 다시금 감상하려고 합니다.
“에드바르트 그리그 (Edvard Grieg, 1843~1907, 노르웨이)
노르웨이의 항구도시 베르겐에서 태어난 국민주의 음악가, 그리그는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같은 베르겐 출신의 유명한 피아니스트 올레 불의 인정을 받아, 그의 권유로 15세 때(1858년)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유학하여 4년간 작곡과 피아노 주법을 배웠다.
“1862년 졸업 후 베르겐으로 돌아온 그는 거기서 작곡가와 피아니스트로 정식 데뷔했다, 귀국 후 21세 때, 같은 노르웨이 출신의 젊은 작곡가였던 노르드라크와 깊은 우정을 맺고, 그의 영향을 받아 그리그는 완전히 국민주의의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이듬해 코펜하겐으로 옮긴 그리그는 덴마크 작곡계의 대가인 닐스 가데와 리하르트 노르트라크를 만나 <오이테르페 협회>를 발족, 노르웨이 작곡가들의 작품 연구와 연주활동에 주력했다.
1865년에 로마로 여행했고, 1870년에 리스트의 초대로 재차 로마를 방문하게 되는데, 이때 그리그의 《피아노협주곡》(1868)을 연주한 리스트는 그를 매우 극찬하였다
유명한 그의 《장송 행진곡》은 잠시 로마에 있던 시절에 노르트라크의 사망 소식을 듣고 작곡한 곡이다.
다시 노르웨이로 돌아온 그리그는 오슬로 음악원 부원장, 필하모니아 협회의 지휘자 등을 겸하면서 작곡가에 몰두했으며, 여류 성악가 니나 하게루프를 사랑하게 되어, 안데르센의 시에곡을 붙인 가곡 《나 그대를 사랑해》를 작곡하여 유명해졌고, 그들은 결혼해서 오슬로에서 생활했다.
1867년에 오슬로 음악 협회를 조직하여 7년간 지휘자로 활약했고, 1874년 31세 때 노르웨이 정부로부터 국가의 종신 연금을 얻어 작곡에 전념했다.
그 후 고향인 베르겐이나 오슬로에서 주로 생활했다.
1885년부터는 베르겐에서 조금 떨어진 트롤드하우겐에 집을 짓고 쇠약해진 몸을 요양하면서 전원생활을 즐겼다.
이 사이에 가끔 라이프치히, 로마, 파리, 런던 등지를 여행하여 자신의 작품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그의 아내 니나는 그리그의 가곡을 직접 불러 보급하는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그리그는 1907년에 영국으로 연주 여행을 떠날 때, 배를 타기도 전에 병이 무거워져 베르겐의 병원에서 9월 4일, 세상을 떠났다.
그리그는, 1877년부터는 로프트휘스에 틀어박혀 작품 창작에만 몰두하며, 세상을 떠나는 1907년까지 피아니스트로서의 발표회도 쉬지 않았다.
그가 남긴 《교향적 무곡》《서정 모음곡》《제3바이올린소나타》(1885∼1887), 피아노곡인 《노르웨이의 농민무용》(1902) 등은 견고한 하모니와 감수성이 노르웨이 민속정서와 잘 어우러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사랑받고 있다.
특히 입센의 부수음악으로 작곡한 《페르귄트》(1876 초연)는 가장 유명한 곡이다.”